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이 두 차례에 걸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고 현장으로 돌아간다. 2001년 공장이전 강행과정에서 정리해고 당해 6년 간 싸워 복직했지만 시그네틱스는 2011년 또다시 정리해고의 칼날을 휘둘렀다. 여성노동자들은 지난해 말 법원 판결에 따라 1월11일 안산공장으로 복귀한다. <노동과세계>가 금속노조 씨그네틱스분회 투쟁 당사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두 차례에 걸친 해고 때마다 완강히 싸워 현장으로 돌아간 시그네틱스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 대해 들어봤다. 만남의 자리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 소재 이미자 조합원 집에서 진행했다.
일시 : 2013년 1월 7일 월요일 오전 10~13시
장소 : 서울 강서구 등촌동 소재 이미자 조합원 집
정리 : 홍미리 <노동과세계> 편집국장
사진 : 변백선 <노동과세계> 사진기자
시그네틱스(주)는 1966년 외국자본(미국 signetics사) 투자로 만들어진 반도체 부품 조립업체다. 이후 95년 국내 업체인 거평으로 인수되고, 97년 한국 IMF 외환위기 영향으로 98년 위크아웃 대상업체로 선정됐다가 2000년 현재의 영풍그룹으로 인수됐다. 일부 미국과 유럽으로의 수출물량을 제외하면 삼성에 대한 납품이 매출의 대부분이다.
1967년 9월 8일 노조를 설립, 2001년 8월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2011년 정리해고자 28명과 2001년 해고로 대법까지 패소한 노동자 28명 등 총 56명이 조합원이다. 2001년 공장이전 문제로 파업을 시작해 현재까지 투쟁을 잇고 있다.
윤민례 분회장 등은 2000년 11월 임원선거 때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당시 입사 3년 차였던 정혜경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노조 위원장에 당선됐다. 전 위원장이자 회사와 어용 남성 조합원들이 밀던 유은주 후보가 아닌 자신이 당선된 것은 조합원들의 위기의식 때문이었을 거라고 정 부위원장은 생각한다.
“제가 당선되자마자 회사는 안산으로 공장을 이전하니 이주불가자와 희망퇴직자를 신청하라고 했어요. 전 집행부는 단협을 통해 공장이전에 합의했고 조합원들은 파주가 아닌 다른 지역은 꿈도 안 꾸고 있는 상황이었죠.”
2000년 12월 새 집행부가 임기를 시작했다. 윤민례 분회장은 2001년 4월 회사가 공장이전을 위해 이주불가자를 모집하며 급물살을 탄 듯 몰아치고, 조합원은 불안해하고 하나로 뭉쳐도 힘든 조건에서 와해 직전까지 갔다고 말한다.
그는 간부 절반이 사표를 내려고 마음 먹은 심각한 상황에서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고 말하고는 웃기 시작했다. “2001년 4월 정혜경 위원장 첫 번째 삭발할 때였어요. 딱 절반을 밀었는데 바리깡이 고장난 거에요. 조합원들은 막 엉엉 울면서 ‘위원장님 삭발하지 마요, 하지 마요’ 하다가 바리깡 고장나서 못 밀고 있는 걸 보더니 웃음보가 터졌죠. 제가 근처 미용실에서 바리깡을 빌려다 마저 밀었다니까요.”
씨그네틱스 노동자들은 그 해 6월12일 민주노총으로의 조직변경에 성공한다. 한 달 전인 5월까지 회사가 교섭에 안나와 교섭다운 교섭을 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종합사무실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던 노조는 사측의 노조파괴시나리오를 발견한다.
야간 순찰을 돌던 정혜경 당시 시그네틱스 노조 위원장은 총무실 종이 분쇄기 옆 쓰레기통을 웬지 들여다보고 싶더란다. “그날 밤에 회사가 공장이전 관련 PPT 파일들을 다 분쇄기에 넣었는데 그게 비닐이라서 잘렸어도 글씨가 다 보이더라구요. 정혜경 집행부가 당선되자마자 진행된 내용들이 다 들어있었어요. 조합원을 어떻게 분리지 그런 내용들이었어요.”
당시 한국노총 금속연맹을 찾아갔을 때 상급단체는 영풍은 돈도 많고 세니까 웬만하면 그냥 합의하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조합원들은 분개했고 민주노총으로 조직을 변경했다.
회사가 7월 3일부로 휴업을 하고 공장에 못 들어간다는 공고문을 붙였다. 3주 후 공장이전을 강행하기 위해 짐을 싸려는 속셈이었다. 노조는 그날 전면파업을 선언하고 염창동 공장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70년대 선배들을 불러 3주 간 조합원 교육을 진행하며 공장 담벼락을 사수했어요. 교육 3주 만에 조합원들 눈빛이 달라졌죠. 간부들은 지쳤는데 눈이 반짝 반짝 열의가 높은 억순이들이 돼 있었어요.”
7월 마지막주에 안산으로 출근하라는 인사명령서가 날아왔지만 조합원들은 염창동으로 출근했다. 8월 9일 경찰이 밖에 대기한 상태에서 용역깡패가 현장을 침탈했다. 용역 200여 명이 정문으로 밀고 들어와 조합원들 사지를 들고 끌어냈다.
정혜경 전 부위원장. “운동화를 빨아 널어놓고 1인용 텐트에서 자고 있는데 누가 회사 근처에 새까만 애들이 깔렸다고 다 깨우라고 했어요. 화들짝 일어나 운동화 끈도 못 끼고 사람들 깨우고 연락하고, 조합사무실 문을 걸어 잠근 채 컴퓨터에 있는 중요한 자료들을 빼려고 했어요. 용역이 해머로 철문 내려치던 소리가 지금도 생각나요. 벽이 뚫리고 사지가 들려 끌려나왔죠.”
당시 사무국장이던 윤민례 분회장. “전 조합 사무실에서 자다가 비상이라고 해서 일어나 노조 재산인 통장을 챙겼어요. 회계 서류는 집에 다 갖다 놨었구요. 반도체공장은 벽도 없는 미로라서 모르는 사람은 길을 못 찾아요. 용역이 절 끌고 2층 식당으로 헤매길래 제가 길을 가르쳐줘 나왔다니까요.”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러 시그네틱스 염창동 공장으로 달려갔다. 노조가 열흘 뒤인 8월18일 다시 공장에 들어갔을 때 모든 장비가 다 빠져나가고 그야말로 황량했다. 모든 건물 벽에 구멍이 뚫리고 땅에는 구덩이가 파져 있었다. 수도시설과 변기도 다 박살나 있었다. 큰 건물과 부지 어느 한 구석 성한 데가 없었다.
“들어가서 천막을 치고 경비실을 개조해 연탄보일러를 깔았어요. 철거업체가 갖다놓은 컨테이너를 수배자 숙소로 썼죠. 9월이 되자 간부와 조합원 5명에게 해고통보서가 날아왔고, 결국 전원이 해고됐어요. 지도부와 조합원 91명 전원에게 임금과 주택 가압류를 걸었어요. 여성 용역깡패 출현과 전 조합원 임금 가압류는 씨그가 최초였어요. 지도부 5명은 수배됐구요.”
지도부 발이 묶이자 조합원들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투쟁을 전개했다. 영풍 본사, 파주공장, 산업은행을 비롯해 전국의 투쟁사업장 안다닌 곳이 없었다. 하루종일 밤 늦게까지 집회를 대여섯 곳씩 다녔다.
2003년 중노위가 복직시키라고 판정하자 조합원 일부가 안산공장으로 들어갔고 2006년 대법 판결에 따라 그 이듬해 나머지 조합원들도 복직했다. 그러나 29명 간부의 해고는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2007년 1월19일 복직해서 일하던 조합원들은 2011년 7월14일 두 번 째 해고를 당했다.
“계열사로 전직하라는 회사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한 이들은 정리해고 대상자가 됐어요.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그네틱스분회에 한해서 정리해고를 단행했죠. 2001년 투쟁이 다시 확인된 셈이었어요. 다시 싸우자고 결의를 모아 투쟁을 시작했고 결국 현장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윤민례 분회장은 1월11일 조합원들 복직을 앞두고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느라 하루 해가 너무 짧다. “두번 째 복직투쟁을 하면서 민주노조를 지켜야 내 일자리가 지켜진다는 것을 우리 조합원들이 깨달은 것 같아요. 지금은 팔다 남은 치약을 어떻게 할지, 해고기간 임금 나온 걸 어떻게 처리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정혜경 전 부위원장은 씨그 조합원들이 두 번 째 해고에 맞서 완강히 싸워 승리한 것이 기쁘기 그지없다. “정리해고 싸움이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으로 승산 없는 싸움 아니냐는, 승산이 제로에 가까운게 아니냐는 인식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명분상 경영상 위기로 인한 정리해고라고 했지만 우린 그걸 확인한 바 없었어요. 민주노조를 없애는 작업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형식적으로 빌린게 정리해고였던 거죠.”
“쌍용차를 비롯해 전국에 정리해고 사업장이 많은 상황에서 비록 규모는 적으나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이 1년 수 개월 투쟁해서 다시 그룹의 항복을 받아낸 겁니다. 중소 규모 사업장에서 그것도 여성노동자들 승전보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봐요.”
1979년 시그네틱스에 입사한 이미자 조합원은 2001년 투쟁 당시 왕고참 언니이자 평조합원으로서 대오를 굳건히 지킨 씨그 투쟁의 산 증인이다. 윤민례 분회장은 회사가 임금을 몇 개월 안 준 채 노동조합에 넘겨버린 직장어린이집을 당시 이 조합원이 맡아 관리했다고 전한다.
“2001년 한참 투쟁할 때 언니가 어린이집 선생들을 다독이며 조합원 아이들을 돌봐줬어요. 여성들은 투쟁을 하려고 해도 아이 문제 때문에 어려울 때가 많아요. 저도 아이가 4살, 7살 때 8개월 간 수배됐다가 구속됐는데 언니가 다 키워줬어요.”
이미자 조합원은 해고에 맞서 싸워 지거나 포기한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늘 후회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회사가 정말 어려웠다면 저도 포기했을지 몰라요. 그런데 영풍은 그게 아니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포기하면 기업들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날뛸 것 같았죠.”
그는 영풍이 의외로 쉽게 무너졌다면서 힘차게 들어가 현장을 지킬 것이라고 말한다. “죄 없이 징계해고된 간부들은 복직을 못했는데 그것도 우리 몫이에요. 징계해고자들과 함께 근무하는 것이 완전한 승리죠. 지금의 승리는 절반이구요. 그 숙제를 안고 현장에 들어갑니다.”
가진 사람들이 정말 나쁘고 그것을 방관하는 정부도 잘못이라고 말하는 이미자 조합원. “경영상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정리해고를 하고 정규직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정부도 인정하니 기업은 마음 놓고 해고 칼부림을 하죠. 노동자들은 힘들고 가정은 파탄나고 아이들 성장에도 문제가 돼요. 새 정부가 정리해고 사업장들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정혜경 전 부위원장은 정리해고 사업장 문제를 단순히 몇몇 내쫓긴 이들만의 문제로 시야에서 멀리 해선 안된다고, 모든 이들의 문제이며 모든 이들이 나서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다. “노동자가 현장에서 내쫓기는 순간부터 정상적인 생황을 영위하지 못해요. 실직자와 해고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구축돼 있는 것도 아니구요. 씨그는 현장 복귀의 길을 열었지만 많은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쌍용차, 한진중공업 등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정혜경 전 부위원장이 씨그에 입사한 2000년 윤선애 조합원은 솜털이 뽀송뽀송한 막내였고 지금도 노동조합에서 거의 막내뻘이다. 2001년 투쟁 때 7개월이던 윤 조합원의 첫 아이가 지금 13살이 됐고, 투쟁과정에서 둘째와 셋째를 낳았다.
선배 언니들은 동생 윤선애 조합원에게 아이 키우랴 노조 일 하랴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격려한다. 그는 아이들 아빠가 많이 도와줬고 안 그랬으면 정말 어려웠을 거라고 말한다.
씨그네틱스투쟁은 가족대책위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여성노동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데는 가족의 도움이 컸다. “2001년 정혜경 위원장이 당선되고 제가 사무국장을 맡아 남편에게 아무래도 싸움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니까 하라고 했어요. 가족대책위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저부터 먼저 해야 했어요. 노조 상근자 중에서 저만 결혼한 아줌마였거든요.”
가대위 첫모임에 30여 명이 모였고 10명 정도는 매일 농성장에 모여 핵심적으로 활동했다. 2001년 8월9일 용역에게 쫓겨났다가 다시 밀고 들어갔을 때 천막 치고 화장실을 설치하는 등 농성장을 만드는 것도 남편들이 해줬다. 목수, 전기쟁이, 고철업 등에 종사하는 남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농성장으로 퇴근해서 부인들과 농성을 함께 했다.
씨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힘과 저력은 뭘까? 윤민례 분회장은 “의리”라고 단호히 말한다. “2002년 조합비도 없고 조합원들은 생계투쟁을 할 때 간부들은 우리가 계속 투쟁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야 했어요. 집단알바, 집단투쟁을 하며 버텼죠. 2007년 조합원들이 복직해 들어가자 조합비를 떼서 한국노총에 줬어요. 우린 금속노조 탈퇴만 안하고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정혜경 전 부위원장은 서로간의 신뢰, 어려운 시기에 결단하고 분회를 이끌어가는 지도부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바로 시그네틱스의 저력이라고 했다. 윤민례 분회장이 거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쟁이니 가열한 것보다 서로 간의 신뢰가 더 중요했어요. 2009년 해고기간 임금이 제 통장으로 일괄 입금됐는데 전화해서 묻는 조합원이 한 명도 없었어요. 갖고 튈까봐 걱정도 안됐나봐요. 조합원들이 그 해고기간 임금을 1차 때 복직 못한 간부 29명에게도 나눠줬어요. 꽤 큰 액수였죠.”
정혜경 전 부위원장은 씨그 투쟁에서 새길 것은 2001년 단협이 해지된 후 십 몇 년이 흐른 상황에서 내 일자리를 지키고 민주노조 사수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규모도 크고 조직력도 좋은 사업장일수록, 규모도 적고 어려운 비정규직 영세사업장에서 민주노조 깃발을 쥐겠다고 투쟁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연대하는 것이 민주노총 전체의 새로운 힘을 축적하고 기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자 조합원은 경영상 이유 없이 회사가 정리해고를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본인들이 투쟁할 의지가 있는데 생계 때문에 못하고 조직이 흔들리고 그런 모습이 가장 마음 아파요. 자본이 그런 걸 노리고 우리를 해고 시키죠. 진짜 어렵고 부도날 정도면 예외적으로 해야 하겠지만 잘 나가는 회사들이 정규직노조를 파괴하는 것을 정부가 가만 놔두면 안됩니다.”
윤민례 분회장은 씨그 현장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우스개로 민주노총년이냐, 한국노총년이냐 하는 말이 있어요. 자존심이 하늘까지 올랐어요.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모두 협력사로 갔는데, 씨그네틱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지켰잖아요.”
그는 씨그네틱스 조합원 모두가 자신이 민주노총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실천하고 있다면서 민주노총 조합원 모두 힘내면 좋겠다는 새해 인사를 보냈다.
씨그 조합원들이 영풍 현장에 복귀하는 것은 조합원들 단결된 힘과 더불어 투쟁하는 동지들의 연대 덕분이라고 했다. “전국 17개 정리해고 사업장 중 하나가 씨그였고, 많은 연대와 애정을 받았어요. 민주노총 정리해고연석회의에 계속 결합할 겁니다. 우리보고 두 번 해고된 사람들 같지 않게 참 밝다고 했어요. 이긴다는 확신을 갖고 희망을 키워가면 좋겠어요.”
정혜경 전 부위원장도 어렵게 싸우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따뜻하면서도 결연한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상황을 비켜갈 수 없다면 정면돌파해야 합니다. 정리해고 명단에 자신 이름이 포함됐으면 당당히 싸우면 돼요. 그 길 끝에 승리가 있을 거에요. 그런 한 사례를 씨그가 만들어낸 거죠. 민주노총이 힘을 못 쓴다고 하는데 그 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고, 우리 조합원들이 힘내서 투쟁해야 할 때 투쟁함으로써 함께 만드는 겁니다.”
